[유린주희] 거짓말
유린은 공부를 하다가 잠시 허리를 피며 지금까지 정리한 노트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려 밖에서 들려오는 tv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는지 방청객들이 깔깔대며 웃는 소리와 함께 최대한 소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키득대는 주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근 말이 눈에 띄게 적어진 주희가 신경쓰였지만 유린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해 그저 초조한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시험은 마지막 하나가 남았고 아직 날도 몇일 남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어제 모든 일정이 끝났어야 하지만 교수님이 갑자기 출장을 가시는 바람에 시험기간이 길어진 것이다. 조금 말이라도 걸어볼까.라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한참을 머뭇거리기만 하고 결국은 다시 제자리에 앉아 펜을 잡았다.
최근 몇 번이나 대화를 시도 했었다. 하지만 매번 실패하거나 어물쩡 넘어가버리게 되는 것이다. 눈치가 빠른 주희는 자신이 꺼낼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평소처럼 보채거나 곧바로 물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예상하고 있는지, 이미 눈치채고 있는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아무말도 해주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평소에는 언제나 솔직하고 직구 던지는 것이 당연하던 사람이 이렇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니 너무나도 답답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오랫동안 고민하다가는 맘이라도 편히 먹기위해 주희는 아무것도 모른다. 라고 결론 내리고 마는 것이다.
사실 자신의 유린은 주희에게 정확히 무엇을 물어봐야 하는지 몰랐다. 그냥 이전보다 대화가 조금 줄고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든 것 뿐 변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줄어든은 시간은 서로의 스케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이다. 그런 것들을 고려한다면 어린애처럼 그녀 앞에서 투덜대거나 불평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나이 차이를 생각한다면 그런 일들을 벌리고 싶지는 않았다. 유린은 착잡한 마음을 다시 정리하며 노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주희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서 몇 번이나 채널을 돌렸지만 마땅히 볼만한 프로그램을 찾지 못해 tv를 껐다. 다시 집 안에 찾아온 정적. 시험기간이라 정신없이 공부하기에 바쁜 유린이 있는 방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왔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난 후로 유린은 언제나 방문을 열어 놓은채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예민한 성격에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하면서 주희를 위해 항상 문을 열어놓고 공부를 하거나 작업을 했다. 그런 마음이 고마워 처음에는 tv도 잘 보지 않았지만 유린이 그럴필요가 없다고 말해준 후로는 소리를 작게 해두고 tv를 시청하거나 음악을 듣고는 했다.
고개를 돌려 불빛이 나오는 방안을 바라보다가 시계를 확인했다. 밤 11시. 아침에 약한 유린이 가장 공부하기 좋은 시간이다. 이 시간이 되면 주희는 피곤함을 느끼고 눈이 반쯤 감긴채로 있지만 유린의 눈에서는 구슬을 박아 놓은 것처럼 언제나 빛이 났다.
주희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부엌에서 커피를 꺼냈다. 조용히 커피를 갈아 드리퍼에 넣고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주전자에 물을 담고서 뚜껑을 연채로 온도가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뚜껑을 닫지 않은 구리 주전자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와 얼굴을 덮었다. 뜨거운 온기에 눈을 슬며시 감았다가 부드럽게 입김을 불어 하얀 김들을 허공에 흩트렸다. 시간이 흘러 김이 천천히 주전자를 타고 흘러 내릴때쯤 뚜껑을 닫고 갈아진 원두 위로 물을 부었다.
가운데부터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일정한 속도로, 일정한 각도를 유지하면서 물줄리의 굵기의 변화에 주의해서 작은 원을 그리며 천천히 바깥을 향한다. 종이에 물이 직접 닿지 않게 하는 것이 포인트. 한번 원두를 적실만큼 물을 붓고서 1분정도 기다린다. 유린이 이전에 가르쳐줬던 노하우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주희는 주전자를 들어올렸다.
싱싱한 원두여서 그런지 부엌을 가득매우는 커피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1분정도 시간이 지난 뒤 모락모락 거품이 나는 모습을 보며 주희는 정성스레 커피를 내렸다. 두 번 정도 모락모락 올라오는 거품을 내며 원두를 내린 뒤 마지막에는 물을 한 번에 붓고서 물이 반쯤 내려갔을 때 드리퍼를 들어올렸다. 마지막 물까지 모두 내리게 되면 쓴맛이 남게 되어 커피의 맛이 나빠진다고 주의를 줬던 그녀의 마지막 조언까지 모두 지켜낸 순간이었다.
찬장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커피잔을 꺼내 원액을 담아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마실 커피에는 주전자에 남아 있던 물을 타 연하게 만들었다. 커피를 들고 방문을 열자 쉴 틈 없이 무엇인가를 적고 있는 유린의 뒷모습이 보였다. 무엇인가 하나에 빠지면 집중력이 뛰어나 왠만해서는 잘 빠져나오지 않는 저 모습을 좋아하지만, 이렇게 자신이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돌아봐주지 않는 무심함에는 가끔씩 상처받기도 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오늘이 그 날이 될 것 같다고 주희는 생각했다.
애써 담담한 척 발걸음을 옮겨 조용히 그녀 옆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향기 때문인지, 아니면 인기척 때문인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내려놓은 커피를 한번 보고 주희를 올려보았다.
“아, 고마워요.”
“...너무 무리하지 마요.”
“이제 거의 끝나가니까 괜찮아요.”
언제나 그녀는 같은 말을 반복한다. 괜찮아요. 이러니까 괜찮아요. 저러니까 괜찮아요. 힘든 것이 있어도 한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통해 듣고 화가 난 채로 찾아가면 두 손으로 어깨를 부드럽게 잡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괜찮아요. 이제 다 해결됐어요.
주희는 과거의 기억들을 애써 지우며 유린이 눈치채지 못하게 낮은 한숨을 내어쉬었다. 혼자 자면 외로우니까 어서 끝내고 와요.라던지 30분 줄께요. 약속 어기면 내일 아침식사 당번이에요.라는 농담을 던져야하는 주희가 아무말도 하지 않다 유린은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주희씨?”
“...괜찮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요.”
주희는 자신의 반응이 평소와 달랐다는 것을 의식하고 방금 전의 행동들을 유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환하게 웃었다. 유린은 표정에 남아 있던 걱정들을 지우며 평소처럼 작게 미소지으며 미안하다면서 웃었다. 주희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려주고 초조함을 지운 발걸음으로 조용히 침실로 향했다. 침실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고 그대로 문에 기대었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언제나 괜찮다고 거짓말 하는 당신을 닮아가는 것일까.
오늘처럼 외로운 날에는 함께 있어도 쓸쓸하고
옆에 있어도 보고싶은 것인데
차마 당시에게는 말하지 못하겠다.
혹시나 당신에게 짐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혹시나 어린 자신에게 질려 떠나버리지는 않을까. 얼마 전에 울며 전화 통화했던 친구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꽤나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과 사귀고 있어서 통하는 것이 많던 친구였다. 헤어지자고 통보받은 그녀가 울면서 늘어놓은 그 이유들이 하나같이 가시처럼 가슴에 박혀왔다. 모두 자신이 유린에게 행동하던 모습들 그대로였다.
‘솔직한 주희씨가 좋아요.’
‘건방지다기 보다는 용기가 있는거죠.’
‘원하는 것을 말해주는게 전 더 좋아요.’
그의 말에 따르면 그런 말들이 자신을 옭아 매고 부담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주희는 처음으로 유린과 자신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치 친구와 그 남자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처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첫 만남부터 유린이 먼저 시작하거나 요구한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유린을 따라다닌 것도 자신이었다. 동성과 사귀는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던 그녀를 붙잡고 따라다니다가 사귀게 된 것도 끈질긴 고백 때문이었다. 나이 차이 때문에 고민하던 그녀의 생각들을 쓸대 없는 것이라며 타박한 것도 자신이었다. 마치 정답만을 말해주는 듯이 자신 만만하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정작 돌아보면 유린은 처음부터 모든 상황들을 파악하고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대 없는 것이라며 그만두라는 자신의 말에 제대로된 반박조차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 주었다. 하. 주희는 다시 한번 자신의 철없는 행동들에 아찔함을 느끼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당신을 만난 뒤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다.
‘...괜찮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요.’
대체 뭐가 괜찮다는 것일까.
대체 누가 괜찮다는 것인지.
불안해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건낸 말이었지만 사실 나 자신을 향해 괜찮아져야만 한다고 하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괜찮지 않아진다면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괜찮아야해.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를 붙잡아 현실이라는 시궁찰에 몰아 붙이고 있는 것은 자신이니까. 어떻게든 책임지고 감당해내야 한다.
당신이 내게 했던 것처럼 -
나 역시도 같은 마음인 것 뿐이야. 비록 비겁하게 거짓말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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