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린서연] 데이트
유린은 야구장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서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고 아담한 카페 안에서는 유니폼을 입고 자리에 앉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잘은 모르지만 어떤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가 이번 경기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으로 보아 꽤나 열정적인 팬들인 것 같았다.
“야구장 같이 가보실래요?”
평소에는 특별히 하고 싶어 하는 것도 많이 없고 감정을 드러내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먼저 서로 함께하고 싶었던 것을 하나씩 말하고 같이 해보자고 권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래서 지난 주에 시간을 내어 서울의 남산타워에 다녀왔었다. 외국에서 오랜 시간동안 유학생활을 하다 보니 서울의 남산타워가 어떻게 변했는지도 보고 싶었고 첫 만남 때 서연이 남산타워에 가보지 않았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산타워에서의 시간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즐거웠다. 케이블카를 처음 타는 그녀의 눈빛에서는 약간의 두려움과 동시에 기대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케이블카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점점 몸이 굳어져가더니 케이블카가 바람이나 두 사람의 움직임 때문에 조금씩 흔들릴 때면 굳은 표정으로 몸을 굳혀버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긴장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손을 뻗어 예고도 없이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고개를 휙 돌려 손을 내려 본 그녀와 다시 눈을 마주쳤을 때 약간 붉어져 있는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갈무리할 새도 없는 헤픈 웃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야 말았다. 항상 남들에게 짓는 표정들은 언제나 완벽한 통제 아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런 반응들은 스스로도 놀라운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서연이 보았을 때 잠시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짓더니 바로 곱게 리본으로 묶여있던 실이 투툭 풀어지듯이 부드럽게 그녀의 눈꼬리가 휘어지며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오히려 그 표정에 숨을 잠시 멈출 만큼이나 놀란 것은 자신이었다.
지난주에 그녀와 함께 지냈던 일들을 떠올리면 잠시 미소 짓고 있던 자신을 발견한 유린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그대로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시간에는 아직 5분이 남아 있었지만 평소보다는 조금 늦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보통 약속시간보다 30분은 일찍 나와서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래서 언제나 그녀를 만날 때에는 그녀가 나오는 시간이 맞춰 나와 항상 일찍 만나는 것이 일상이었다.
다른 약속이었다면 시간을 버리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녀를 만나는 것이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조금 더 오랫동안 그녀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니까,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좋은 일이다. 심지어 그녀보다 먼저 나와 기다리는 이런 순간들까지도 즐겁다.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느낄 수 있는 설레임. 항상 글로만 읽고 머리로만 상상했던 일들을 실제로 겪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만 여겨졌고 때로는 자신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문에 달려있는 작은 종이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뛰어 온 것인지 멀리서도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것이 보였고 숨을 채 고르지도 못한 채 문에 기대다시피 매달려 카페에 들어온 그녀를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갔다. 한손에는 모자가 들려있었고 그녀의 어깨에는 평소보다 큰 백팩 가방이 메여져 있었고 평소에는 입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야구점퍼 안에는 하얀색 반팔티에 청색 셔츠를 받혀 있는 캐주얼한 스타일이었다.
항상 학교에서 보던 스타일과는 조금 달라서 왠지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됐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났다. 이렇게 웃음이 헤픈 여자가 아니었는데 최근 겪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중이 하나를 절대로 극복할 수 없을 거라 확신하며 그녀의 팔을 잡아 부축하며 자리로 안내했다. 작은 카페여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져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모자를 빼앗아 그녀의 작은 머리에 씌워주었다. 그녀는 약간 불편했는지 자리에 앉아 모자를 다시 벗었지만 그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제각각 흩어진 후라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도록 그냥 두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시간 정각에 딱 맞춰서 도착했는데도 평소와 달리 조금 늦게 도착한 것 때문인지 사과하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한번도 이렇게까지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이런 모습들까지 이렇게 사랑스러우면 반칙이에요. 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며 가방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이마에 맺혀있던 땀들을 닦아주었다.
“앗, 괜찮아요. 더러운데…”
땀을 닦아주려는 손길을 잡아 내리려던 서연의 손을 막아내고 아무 말 없이 유린은 묵묵히 자신의 연인의 손길에 집중했다. 서연은 가만히 호흡을 진정시키며 시선은 마주치지 않은 채 섬세하게 자신을 돌봐주는 연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데이트장소가 야구장이라는 것을 배려했는지 평소의 그녀의 복장과 매우 다른 느낌. 항상 성숙한 여인의 매력을 풍기며 블라우스에 자켓을 선호했던 유린이 청바지를 입고 나오는 것은 서연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항상 미국에서 대학교 다니던 시절을 이야기할 때마다 청바지를 자주 입었다고 말해주고는 했지만 서연은 제대로 상상해볼 수 없었다. 항상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떠올리다 포기했던 모습을 직접 눈앞에서 보는 기분은 마치 브라운 관 속의 연예인을 보는 기분이었다. 객관적으로 유린의 모습을 평가한다면 누가 보더라도 미인이고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을 한번씩 돌아보게 만드는 매력적인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가진 것도, 보잘 것도 없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도 벌써 1년 전의 이야기. 사귀게 된 것은 얼마 전. 생각해보면 1년 동안이나 시간을 들여 자신에게 공을 들인 유린이 가끔씩은 환상속의 인물로 여겨질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현실적인 느낌이 없어지는 순간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서연씨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죠?”
“아, 전 괜찮아요!”
일어나 주문을 하려던 유린의 팔을 급히 잡으며 서연이 급히 소리쳤다. 작은 카페에서 큰 소리 때문에 주목을 받는 것이 느껴졌는지 서연은 머슥 해 하며 손을 거둬들였다. 평소보다 큰 소리로 외치듯이 말하고서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는 서연을 바라보던 유린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 하지만 평소 침착하고 당황하는 기색을 쉽게 볼 수 없는 서연이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린은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학교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서연의 뺨을 감쌌다. 서연은 가만히 유린과 눈을 마주쳤다.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뺨을 두 번 쓸어내린 유린은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 지은 채 갈까요. 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에서 나왔다. 테이블에 남겨 있는 빈 커피잔을 한번 바라보고 서연은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났다. 이미 그녀는 카페의 문을 나서고 있었고 닫히는 문틈 사이로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보였지만 이전처럼 어떤 불안감도 존재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서연의 가슴 속에 간질거리는 무엇인가가 그것을 더욱 확신하도록 만들었다.
+
“원래 경기는 5시에 시작 하는 거 아닌가요?”
그냥 가벼운 질문이었다. 유린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너무 일찍 만났다는 것을 타박하는 질문도 아니었고 야구에 대해 잘 모르는 자신이 건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질문을 듣자마자 서연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모습을 보며 유린은 자신이 실수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린의 가볍지만 전혀 가볍지 않은 질문을 받아들인 서연은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버렸다. 야구를 좋아하는 자신은 항상 야구장에 일찍 와서 선수들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혼자 이것저것 생각하기도 하고 뉴스도 보고 기회가 된다면 사진도 찍고. 하지만 유린이 그런 시간들을 원하고 있을지, 너무 지겨워하지는 않을지 전혀 고려해보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약속을 잡을 때는 떠올리지 못했던 인터넷에서의 여러 기사들이 물위에 기름이 둥둥 떠오르는 것처럼 선명하게 생각나기 시작했다.
‘연인이 뽑은 가장 최악의 데이트 - 야구장’
‘야구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절대 야구장 가지 마라.’
‘진정한 야구팬이라면 경기는 친구들과 함께’
아, 멍청이. 우선은 사과부터 해야…
“아, 죄송해요. 제가 아무생각 없이 평소처럼 이렇게 일찍 나오자고…”
서연은 자신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깍지를 끼어오는 유린의 손길에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오늘 만난 그녀는 조금 이상하다. 평소에도 자신을 향해 잘 웃어주고는 했지만 오늘은 뭔가 더 다른 느낌. 그동안에는 보이지 않던 투명한 막이 있어서 조심스러웠다면 오늘은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다. 어떤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그녀는 언제나 긴장되어 있는 사람이었는데 - 자신을 향해 보여주는 그 미소에서는 그 어떤 위화감이나 긴장감도 없었다.
“괜찮아요. 서연씨가 원하는 거라면 저는 뭐든지 좋다고 이미 말 했잖아요.”
부드럽게 말해주는 그 목소리에 취한 듯 잠시 몽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손으로 손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그녀는 말했다. 평소에 일찍 와서 서연씨가 뭘 하는지 알려주면 저도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너무 수상한 사람으로 보이는 일만 아니라면… 유린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조금 민망했는데 지금까지 당당하게 마주해 왔던 시선을 피하며 말을 끊었다. 지금 방금 그거 - 그거 맞죠? 평범한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말이라면 농담이라고 말해야하는 그런 거.
서연은 유린이 지금 애써서 자신을 배려해주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제서야 서연은 가슴 속에 무엇인가 탁.하고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동시에 해방감에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부터 긴장이 완전히 풀려버린 서연은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떻게 이 팀을 좋아하게 됐는지부터 어떤 선수를 가장 좋아하고 감독의 스타일이 어떤지 설명했다.
사실 서연도 야구보다는 축구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뉴스 기사를 보다가 자신을 향해 야유하던 팬들에게 모자를 벗고 고개 숙여 사과한 뒤 타석에 들어섰다는 한 선수의 이야기를 보고 난 뒤 흥미가 생겨 경기를 챙겨보고 기사를 찾아보다가 점점 야구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룰도 잘 몰랐고 전혀 아는 게 없어서 야구 룰과 1군 선수들의 이름을 외우는 데만 1년이 걸렸다. 학교에서도 항상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서연이었기에 평소에 시간을 내서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유린은 서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서연이 지금까지 이렇게 생기 있는 표정으로 오랜 시간 동안 답을 요구하지도 않은 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확히 자신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야구에 관련된 이야기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한 주제에 대해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듯 풀어놓는 모습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야구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어젯밤에 늦은 시간까지 야구에 대해 공부하다 잠들었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서연이 야구의 기초적인 지식들을 설명해주기 시작한 타이밍이었지만 가방에서 내용들이 간결하게 정리된 종이를 꺼냈을 때 그런 일은 시도도 하지 말아야 했다고 결심했다. 받아들은 종이 안에는 야구의 기초적인 룰과 오늘 경기가 있는 두 팀에 대한 간략한 설명들이 있었다. 그리고 각각 선수들 이름, 등번호, 포지션이 적혀 있었고 선수들에 대한 설명들이 간략히 정리되어 있었다.
‘임병욱 - 외야수 2년차. 신입 호타준족. 유망주. 고졸출신’
‘김하성 - 유격수 (2루와 3루 사이). 전년도 기록 19홈런 20도루. 2년차. 고졸출신’
‘고종욱 - 외야수. 전역. 빠른 발이 특기. 전년도 타율 3할.’
외야수. 내야수. 포털 사이트의 메인 창에서 가끔씩 봤던 호칭들이었다. 그리고 고졸 출신이라니. 게다가 전년도 기록까지 적혀 있는 것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유린에게는 와닿지 않았지만 이런 자료들을 정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거라는 것쯤은 느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유린은 종이의 내용들을 한번 쭉 훑어보고 여전히 말을 하고 있는 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은 자신의 표정이 지금 얼마나 생동감 있어 보이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겠지.
“저번 년도에 선수들이 워낙 많이 빠져나가서 걱정이에요. 그래도 김하성 선수나 임병욱 선수같은 고졸출신 젊은 선수들이 있다는 게 다행이고…아, 저기 보이는 저기 키 큰 사람이 임병욱 선수구요 그 옆에 작은 사람이 김하성 선수에요.”
유린은 서연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운동장 끝까지 달려갔다가 다시 돌아 뛰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은 한 눈에도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젊어 보였다. 그리고 예측컨대 서연은 이 팀에서 임병욱 선수를 가장 좋아하고 또 많이 기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린은 자신의 예측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고 서연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항상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파고드는 습성이 몸에 베인 자신도 서연을 온전히 다 파악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어째서인지는 아직 잘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한번 물어볼까.
“서연씨는 임병욱 선수가 가장 좋은 거군요?”
“아,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닌데”
틀렸네.
“가장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 것은 맞아요.”
환하게 웃으며 그 이유를 설명하는 서연을 바라보면서 유린은 그래도 절반은 맞췄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경기가 시작되기 시작하기도 전에 경기장에는 사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영화관보다도 자리가 좁고 옆자리와 구분되어 있지 않아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부 들려왔다. 이렇게 시끌벅적한 곳에서 경기를 하는 선수들이 신기했다. 물론 이것도 견뎌내야 하는 것이 선수들의 몫이겠지만. 유린은 국민의례가 끝나고 타석에 선수가 들어섰다가 뜬공으로 아웃 될 때까지도 자리에 돌아오지 않는 서연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같이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어디 들릴 데가 있다고 먼저 자리에 돌아가 있으라고 하던 서연을 떠올리며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는 사실에 조금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대해 놀랍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언제부터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익숙했다고 벌써 이렇게 잠시 떨어져있는 것만으로도 외롭다니. 그녀를 발견하기 전까지의 자신이라면 절대 상상할 수 없던 모습이었다. 남이 무엇을 하든지 중요하지 않고 내가 무엇을 결정하는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가장 우선순위였던 사람이 누군가를 자기 자신보다 앞에 둔다니.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유린은 전혀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서연씨가 원하는 거라면 저는 뭐든지 좋다고 이미 말 했잖아요.’
스스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마치 남에게서 들은 것처럼 여전히 뇌리에 박혀있는 한 마디. 내 뱉어 놓은 스스로도 놀랐고 또 당황했다. 그리고 인정했다. 서연이 자신에게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왜일까. 언제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녀를 좋아한다.’ 아니, 그 정도의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 할 정도로 ‘사랑하고 있다.’ 라는 결론을 내리는 일들의 반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이런 일이 정말로 일어날지는 몰랐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사람들이 앞을 지나가 자리를 찾아갈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은 조금 불편했다. 좀 더 앞을 내려 보자 테이블에 앉아 있는 좌석이 보였다. 다음에는 편안하게 자리를 앉을 수 있게 테이블 석으로 구경 오자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 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서연이었다. 그녀의 두 손에는 무엇인가 가득 들려있었다. 유린은 그제 서야 브런치를 먹은 뒤 카페에서 마신 커피가 전부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우숩게도 그제 서야 주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주전부리를 먹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전까지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던 풍경들이 었다. 지금까지 닫혀 있던 시야가 한 번에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서연은 유린과 눈이 마주치자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계단을 올라 옆자리에 앉았다.
“죄송해요. 들어오면서부터 사오면 음식이 다 식어서…”
“그냥 같이 가자고 하지 그랬어요. 혼자 들고 오기 힘들었을 텐데.”
유린은 한손에는 치킨을 한손에는 캔맥주가 들은 봉투를 들고 온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다.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어울리지 않는 일을 했을 때 절로 웃음이 난다는 말을 들어 본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바로 이런 경우에 그런 말을 쓰는가보다.
“기다리는 줄이 길거든요. 혹시 술,괜찮으세요?”
유린은 차가운 맥주 때문에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는 봉투를 받아들며 말했다. 그럼요.
경기는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았다. 분명 3회 까지만 해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꺼내며 선수들의 움직임에 대해 설명해주던 서연이 침묵하게 된 것은 실책으로 역전 당하면서 부터였다. 유린은 대체 오늘 서연이 자신을 몇 번이나 놀래 킬 작정인지 세어보기를 포기했다. 이렇게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서연이 신기했지만 한편으로는 보기 좋았다. 하지만 평소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야구를 보러온다는 말을 떠올리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되면 야구를 보면서 더 스트레스 받는 상황이 되어 버리는 거 아닌가요. 말하지는 못했지만 야구를 보면서 서연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 점점 더 확신해가고 있었다.
5회 말. 분위기는 더욱 살벌해졌다. 오심으로 아웃되면서 점수차를 줄일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수 없이 공수교체가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격분한 분위기 속에서 선수들은 덕아웃으로 들어갔고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어수선해지는 분위기에 유린이 주위를 살피고 있을 때 서연이 정신을 차리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브레이크 타임이거든요. 이 시간에 그라운드도 정비하고 사람들이 화장실도 다녀와요.”
“그렇군요. 서연씨 괜찮아요?”
“네?…”
유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서연은 무엇에 대한 질문인지 한번 생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언제부턴가 자신이 유린에게 말도 안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연은 당황하며 또 사과했다. 아니에요. 서연씨가 집중해서 보는 모습이 저는 더 좋았는걸요. 유린은 솔직히 답했지만 서연은 그것을 믿어주는 기색이 아니었다. 유린이 어떻게 괜찮다는 것을 알려줘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커다란 전광판으로 화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 이벤트네요.”
“이벤트요?”
“가끔씩 야구장에서 이벤트 같은걸 하고 관중들한테 선물을 줘요. 냉장고나 노트북 같은 것도 주고…”
“와, 꽤 비싼 것들인데 그런 이벤트도 있네요?”
“홍보 효과도 되고 이벤트라고 해더라도 꽤 짓궂은 일도 많이 시켜서요.”
“짓궂은 일이요?”
“보시면 알아요”
유린은 고개를 들어 화면에 뜨는 문구를 읽었다. 뭐야. 이거. 유린이 말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을 때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응원석에서 MC가 크게 외쳤다.
“시작됐습니다! 키스타임!”
유린은 웃으면서 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은 조금 당황한 듯한 유린을 보며 애써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화면에 같이 야구장에 온 사람들을 잡아주거든요. 화면에 잡힌 사람들이 일정 시간 안에 키스에 성공하면 선물을 주는 거에요. 생각보다 그렇게 짓궂지는 않은데요? 그러니까, 그게 연인이나 부부면 상관없는데 가끔씩 친구들끼리 잡히면 좀…아, 그렇겠네요. 게다가 최근에는 남자들 끼리나 여자들끼리도 화면에 잡아주거든요.
유린은 서연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에서의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연은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뭔가 계속 설명하고 있었지만 이내 말을 멈추고 유린을 살피며 주위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이 자신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저 멀리서 보이는 한 무리가 손으로 전광판을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고개를 올려보고 있는 서연과 유린이 화면에 나오는 중이었고 그 밑에는 최신형 노트북을 드립니다. 라는 빨간 문구가 자막으로 화려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1분이라는 타이머가 숫자를 줄여가며 흘러가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이게-”
서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들을 향하고 있는 시선을 어찌해야할지 모른 채 당황하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 있었지만 떨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유린은 부드럽게 고개를 돌려 서연을 바라봤다. 정식으로 사귄 뒤 한 번도 두 사람은 키스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갈팡질팡 마음을 확신할 수 없었던 그 때 더 자주 키스했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때는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사귀고 있지만 오히려 서로 더 조심스러워져서 키스를 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상태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서연씨가 싫다면 하지 않을게요.”
“아니, 사람들이…”
“저는 괜찮아요. 저한테 중요한건 서연씨에요. ”
“저는…저는,”
괜찮아요. 라는 말이 귓가에 들어와 뇌리에 박혔다. 실제로는 단순히 공기의 진동이 귓속에 있는 고막을 울려 그 의미를 파악하고 뇌가 인식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 모든 과정은 한 순간에 이루어졌고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는 단순히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강유린. 이라는 존재를 자신의 연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것이어서 단순하지만 절대 단순하게 여겨지지 않는 역설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느낌은 마치 뇌를 망치로 내려찍는듯한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서 뇌리에 박혔다는 표현이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유린은 손을 뻗어 서연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고운 머리카락들이 잡혔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누구보다 가까운 자리에 서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떨어져 있는 공간이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서로의 얼굴과 몸이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시간은 점점 더 느려지고 거리는 더욱 멀게 느껴졌다. 주변에서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소리가 점점 높아졌지만 그런 것들에는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내 두 눈에 오직 당신만 담아내고 싶은 순간.
입술이 닿기 직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유린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이 닿기 직전 숨을 멈춘 그녀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감겨진 눈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 붉어진 뺨. 긴장한 탓에 바싹 말라있는 그녀의 입술. 유린은 좀 더 강하게 자신의 연인을 원했지만 그랬다가는 자신의 연인도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 알았기에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정말 강한 의지를 갖고 이성으로 감정을 짓눌러 버려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떨어지기 직전 느꼈던 건조함이 안타까워서 그녀의 입술을 살짝을 혀로 적셔주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두 사람이 떨어지자마자 주변에서는 마치 홈런이라도 친 것처럼 환호성이 터졌다. 폭죽이 터졌고 전광판에서는 축하합니다. 라는 화려한 문구가 반짝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서로 웃어대며 박수를 치기도,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유린은 고개를 숙인 채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와중에도 서연의 빨개진 귀가 귀엽게 느껴졌다. 도저히 이대로는 다음 경기를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유린은 서연의 손을 잡고 다 먹지 못한 치킨과 맥주는 그대로 자리에 놓은 채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나오던 길에 이벤트 담당자를 만나 명함을 건내 주고 바로 야구장을 빠져 나왔다. 차에 올라타는 순간까지도 서연은 유린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제 고개 좀 들어요.”
“아…차,창피해요.”
“공식적인 첫 키스가 그렇게 싫었던 거에요? 그러면 좀 상처인데”
조금 기가 죽은 듯이 말하자 서연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 웃고 있는 유린을 보고서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 놀리지 말아요. 그런 거 아닌 거 다 알잖아요. 부끄러워서 눈을 못 마주치겠단 말이에요. 서연은 정말로 부끄러운지 이번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웅얼웅얼 말했다. 유린은 정말 참고 싶었지만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이렇게 무방비하게 소리 내어 웃는 일은.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것에 대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서연은 정신없이 웃어대는 유린을 바라보았고 유린은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웃음을 멈출 수 없었는지 이번에는 운전대를 잡고 고개를 숙이고서는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를 참으려 애썼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두 사람은 진정할 수 있었다. 유린은 왠지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마치 히말라야 정상에 올라 소리를 질러야지만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상쾌함이었다. 항상 가슴에 품고 있던 답답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 나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나봐. 유린은 서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 피할 수 없다. 거부 할 수도 없고 도망 칠 수도 없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심지어 아버지에게도 절대로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 생겼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잃어버린 후에야 소중함을 깨닫는다고 하지만 자신은 그런 부류가 되고 싶지 않다. 소중한 것이 손에 들어왔다면 절대 빼앗기지도 않고 놓아주지도 않는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지. 유린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귓가에 넘겨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유린의 표정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쳐져 있다는 것은 오직 서연만이 알고 있었다.
“당신 이제 큰일 났는데.”
유린이 말했다.
“나 당신이 갖고 싶어.”
이 말을 의미를 당신이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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